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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진 세종대왕릉과 남한강 일대 폐사지를 찾아서... 2020-10-15 17:51:57

관리자

신완섭 기자 ㅣ 기사입력 2020/10/12

천지는 끝없고 인생은 유한하니 (天地無涯生有涯)
호연히 돌아갈 마음 어디로 갈 것인가 (浩然歸志欲何之)
여강 굽이굽이 산은 그림처럼 아름다워 (廬江一曲山如畵)
절반은 단청 같고 절반은 시와 같구나 (半似丹靑半似詩)

지난 1,2차 경기 연천의 고구려성, 안성의 미륵동네 역사기행에 이어 2020년 10월 11일, 고려말 목은 이색(1328~96)이 절찬했던 남한강 일대로 역사기행을 다녀왔다. 굽이쳐 흐르는 남한강 사이로 그림처럼 아름다운 산을 돌아보는 오전 일정은 원주 부론면 한계산 고개 사이의 거돈사지(居頓寺址)와 법천사지(法泉寺址), 오후 일정은 여주의 세종대왕릉 영릉(英陵)과 고달사지(高達寺址)이다.

오전 원주일정
아침 8시 25분경 군포시청 앞에서 어른 14명, 학생 3명 총 17명을 태운 버스는 오전 10시경 원주 한계산 거돈사지에 도착했다. 운동장보다 넓은 대지에 원공국사 지종(930~1018)을 기리는 승묘탑비(보물 제78호)가 우릴 반긴다. 1025년 최충이 문장을 짓고 김거웅이 글씨를 썼다. 탑비와 함께 원공국사승묘탑(보물 190호)이라 불리는 부도(浮屠)가 있었는데 지금은 경복궁 뜰 안으로 옮겨져 있다. 중문지에는 경주 불국사 석가탑의 축소물이라 불러도 좋을 만치 신라 석탑의 전형을 보이는 3층석탑(보물 제750호)이 세워져 있고, 그 뒤로 금당터 자리에는 부처님을 모시던 불대좌 큰 돌만 황량히 놓여있다. 맑은 가을 하늘과 대치되어 천년의 쓸쓸함이 묻어난다.

버스로 10분가량 이동하여 산 너머 법천사지에 도착하니 코스모스가 나부끼는 가운데 여기도 폐사(廢寺)의 기운이 가득하다. 국보 제101호로 지정된 이곳의 지광국사탑은 오랜 침탈의 역사만큼이나 아픈 상처를 지니고 있다. 국권침탈 직후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반환되어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지금은 대전 유성의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안치되어 있다. 원주시는 원래 있던 이 자리에 복원시켜주도록 강력히 요청하고 있지만, 한국전쟁 당시 피폭으로 옥개석 이상이 1만2천 조각으로 대파되는 불운을 겪어 복원계획도 만만찮은 지경이라는 것이다. 8각 원당(圓堂)의 기본형을 벗어나 평면 사각형의 새로운 양식을 보여주는 걸작이지만 지독한 파손 탓에 원형 모습을 보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다행히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 몸돌과 왕관 모양의 머릿돌을 올린 아름다운 탑비(국보 제59호)를 통해 지광국사의 삶과 공적을 느껴볼 뿐이다.

역사기행 때마다 해설을 도맡아 해 주시는 서울시 역사편찬위원회 연구관을 지낸 나각순 박사는 “거돈사지, 법천사지 두 곳에 모셔졌던 석탑이나 승탑, 탑비 등은 하나같이 신라 말 고려 초 불교 문화의 백미를 보여주는 최고의 걸작이라서 국보 또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안타까운 것은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과 2대 양란(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침탈을 거치며 사찰 보물들이 크게 훼손되어 오늘날까지 제대로 보존된 유물들이 드물어 마음이 아프다. 특히 남한강은 예로부터 수로를 통해 한양이나 개성 등지로 물건을 나르기가 손쉬워 남한강 일대의 많은 사찰 유물들이 도난되거나 옮겨졌다”고 설명을 덧붙인다.

신륵사에서의 점심식사
정오에 여주 신륵사 유원지에 도착했다. <산 너머 남촌>이라는 식당에서 곤드레밥과 갈비탕으로 요기를 했다. 반찬 가짓수가 스무 가지에 이르는 데다 음식 맛도 정갈하여 허기를 달래기에 충분했다. 식사 후 이 일대를 둘러 볼 계획이었지만 당초 계획에 빠져있던 여주 고달사지를 꼭 가봐야 한다는 여론에 밀려 이곳 여강(驪江) 일대 유람은 포기하기로 했다. 참고로 여강은 여주를 품고 흐르는 남한강 물줄기를 이르는 별칭이다. 예 선조들은 남한강을 3등분 해서 상부를 단강(丹江), 중부를 여강, 하단부를 기류(沂流)라고 불렀다 한다. 상부와 하단부의 명칭은 쓰임새가 사라졌지만, 예나 지금이나 여강을 오가는 황포돛배는 이곳의 운치를 더해 준다.

오후 여주 일정
서둘러 강을 건너 세종대왕릉 영릉을 찾았다. 엊그제 10월 9일 한글날 이곳에서는 ‘세종대왕릉 제모습찾기’ 준공기념식이 열렸다. 2009년 6월 조선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계기로 대대적인 정비사업을 벌인 결과, 이날 준공식을 가진 것이다. 재실(齋室), 어구(御溝; 대궐이나 왕릉에서 흘러내리는 개천), 연지(蓮池; 연못), 인접한 영릉(寧陵) 등을 원형에 가깝도록 정비하였으며 능제(陵制)와 예법에 맞지 않은 인위적 시설물을 철거하는데 6년이란 긴 시간과 정성을 쏟은 흔적이 역력하다. 새로 지은 재실로 들어서자 정세균 총리가 기념 식수한 앵두나무가 눈에 띈다. 세종대왕이 자손 번성과 다산을 기원하여 좋아했다는 앵두처럼 대한민국의 국운이 번성하기를 빌어본다. 충과 효를 숭상하여 조선시대의 능 관리 책임자인 능참봉의 위세가 대단하였고, 지관과 풍수지리가들 사이에서 천하의 명당으로 꼽혀 예종 원년(1469) 헌릉(서울 서초 내곡동)에 있던 세종대왕릉을 이곳으로 옮겨왔으며, 능상(陵上)은 하나이지만 혼유석이 두 개인 조선 최초의 부부합장묘이고, 왕릉 가는 길에 혼천의, 천평일구, 측우기 등 왕의 업적을 실물로 만날 수 있다. 또 소나무 숲을 따라 ‘왕의 숲길’을 넘어가면 북벌을 꿈꾸다가 41세의 젊은 나이에 죽은 효종왕릉이 나오는데 현재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최고(最古)의 재실을 만날 수 있다. 이래저래 우리나라 최고 성군의 능답게 많은 깨우침을 얻어가게 된다.

또다시 발길을 돌려 마지막 행선지인 상교리의 고달사지로 향했다. 전성기였던 고려 시대엔 사방 30리가 모두 절 땅이었고 수백 명의 스님들이 도량에 넘쳤다는데, 지금은 절터마저 한갓진 곳에 자리잡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잘 생긴 석불대좌(보물 제8호), 원종대사 부도비의 귀부와 이수(보물 제6호), 비교적 온전히 보존되어있는 원종대사 부도(보물 제7호), 빼어난 균형미와 아름다움을 간직한 승탑(국보 제4호)이 찬란했던 과거를 들춰내고 있다. 고달사지 승탑(僧塔)은 원감국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바, 일행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이날의 최고유물로 꼽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국보 1호 남대문(숭례문), 2호 원각사지십층석탑, 3호 북한산 진흥왕순수비에 이어 제4호 국보로 지정이 되었으니 아름답고 고귀하기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역사기행 소감
학생들 해설을 맡은 오은택 선생은 전국에 폐사지가 5,400곳에 이른다고 한다. 한때 찬란했을 남한강 일대의 폐사지 3곳을 둘러보며 인생무상을 실감한다. 그러나 어쩌랴, 무(無)에서 유(有)를 보고, 공(空)에서 색(色)을 느껴야 한다. 고통 뒤에 희열을 맛보는 게 삶의 속성일지니... 끝으로 단풍(短諷)시인인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고달사지 승탑’으로 운을 띄워 자작 시조를 한 수 남긴다. 혹 원감국사의 승탑이 아닐지라도 고승(高僧)의 뜻을 담아 부도에 헌시하려는 마음을 십분 이해해주기 바란다.

고달픈 인생살이 웃으며 살다 가세.
달마가 동쪽으로 갔건 말건 무슨 소용,
사흘을 꼬박 새고도 백발된 줄 모르는데

지나간 세월이야 눈 감으면 먼지 한 줌,
승려가 되려 했던 초심으로 살았나니
탑 속의 거북·용만이 내 뜻을 알 걸세.

기행을 끝낸 시간이 오후 4시가 넘은 시간, 갈 길이 멀다. 고속도로의 교통상황에 따라 길게는 3시간도 더 걸릴 수 있어서다. 다행히 일부 구간에서만 정체가 있었을 뿐, 시간 반 걸려 무사히 도착했다. 학생들이 함께하는 기행은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칠 수가 없다.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너무 늦지 않은 귀가를 학부모들이 원하기 때문이다. 행사를 주관한 사)자연과 함께하는 사람들(대표 이금순) 산하의 교사모임인 참자연교사회(대표 김현복)와 함께 하는 기행은 전직 교사들의 모임체라서 그런지 모든 게 꼼꼼하고 치밀하다. 오늘 행사가 무사히 끝난 것처럼 아이들의 마음속에도 기행의 결과물이 확실히 담겨졌기를 소망한다. 길에서 길을 배우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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